인간도 날개짓을 꿈꾼다.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날개짓을 꿈꾼다. 돌고래는 7m가 넘게 공중으로 껑충 뛰어오르고 날치는 은비늘을 반짝이며 허공을 가른다. 심지어 나무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까치발을 딛는다.
인간도 타는 목마름으로 날개짓을 꿈꾼다. 어꺳죽지가 늘 가려워 피나게 긁는다. 하지만 깃털은 아무리 기다려도 움을 틔우지 않는다. 손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손은 새처럼 날개로 변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한다.
한때 라인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고대 켈트족은 막대를 짚고 개천을 뛰어 넘으며 비상을 꿈꿨다. 러시아 농민들은 쇠스랑을 장대삼아 2m가 넘는 건초 더미를 뛰어오르는 놀이를 즐겼다.
영국에서는 긴 나무 장대를 이용해 돌담을 뛰어넘고, 아일랜드에서는 장대를 짚고 개울을 뛰어 넘었다. 중국인들은 한술 더 떴다. 손오공을 내세워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주름 잡았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사용해 산과 산을 훌쩍 뛰어 넘었고, 과거와 현재를 가로 질렀다. 스포츠는 고대 인간의 삶 속에서 진화한 모습이다
그래서 원숭이는 중국인들에게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뛰는 영물로 통한다. 원숭이해가 되면 중국의 산부인과 병원마다 꽉꽉 차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육상종목의 하나인 장대높이 뛰기에는 날개짓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 수평 운동 에너지가 두둥실 한순간에 수직 운동에너지로 바뀌며 한 마리 새가 된다. 인간은 그 순간 자유와 해방을 느낀다.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은 무아지경이다. ‘중력의 법칙’에 반항하는 먹이를 막 잡아채려는 독수리의 모습과 같다.
오직 두둥실 떠오르려는 생각뿐 몸의 균형도 완벽하고 에너지이 낭비가 하나도 없다. 미학적으로도 너무 아릅답다. 이세상에 수평 에너지를 단박에 거의 직각으로 수직 에너지로 바꾸는 생물은 지구상에 오직 높이뛰기 선수 뿐이다.
장대는 힘을 싣는 데에만 쓰이는게 아니다. 몸의 균형을 잡는 데도 쓰인다. 망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로를 때 화두가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듯 장대는 체조 선수처럼 균형있게 떠오르도록 지지해 준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말한다
“도약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대높이 뛰기 선수는 인간 능력의 집결체이다. 손의 움켜쥠, 어깨와 골반의 근육, 화살을 날리는 활시위처럼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방출하는 장대 등 그 복합적인 행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선견력” 이다.
다시 말해 앞으로의 목표를 세워놓고 자기이 관심을 거기에다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장대의 한끝에서 다른 끝에 이르는 그의 행동과 뛰는 순간으 정신집중 같은 것들은 계속적인 계획의 수행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낙인이 되는 것이다.
장대는 선승들의 화두와 같다.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장대에 의지하지만 그 이후 부터는 장대를 버려야 한다.
장대에 너무 매달리면 다시 중력의 힘에 이끌려 지상으로 떨어진다. 그 뿐이 아니다. 장대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장대가 창이 되어 자신을 찌른다 . ” 스포츠에도 비움의 철학이 적용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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